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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8.6.23.(이웃) / 남해 금산 / 산타나 산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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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9차 남해금산

아기자기한 바윗길 산행
오늘의 야생화 노각나무 까치수염

 

 < 남해 금산 (  山) >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 2일 명승으로 승격되었다. 높이는 681m이다. 원래는 신라의 원효()가 이 산에 보광사()라는 절을 세웠던 데서 보광산이라 하였는데, 고려 후기 이성계()가 이 산에서 100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한 그 영험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 해서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기암괴석들로 뒤덮여 있다. 주봉()인 망대를 중심으로 왼쪽에 문장봉·대장봉·형사암, 오른쪽에 삼불암·천구암 등의 암봉()이 솟아 있다.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을 비롯하여, 삼사기단()·쌍룡문()·문장암()·사자암()·촉대봉()·향로봉() 음성굴() 등 금산 38경을 이루는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그리고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와의 절묘한 조화는 명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산 정상에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기도처의 하나이자 쌍계사의 말사()인 보리암이 있고 그 밑에는 1977년에 해수관음보살상이 바다를 향해 세워졌다.

이동면 복곡 입구에서 금산 8부 능선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인근에 상주해수욕장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출처] 남해 금산 [南海 錦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남해 금산 

 

진시황의 명을 받아 삼신산을 불사약을 찾아 동쪽으로 떠났다는 서복의 동상

<서복(福) >

중국 진나라 때의 방사. 자 군방(君房). 《사기(史記)》에는 서불(徐市)로 기술되어 있다.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불로불사(不老不死)하려는 소원을 풀어주기 위하여, 그는 수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영약(靈藥)을 찾아 바다 끝 신산(神山)으로 배를 타고 떠났으나 중국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서복 [徐福]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몇년전 개방했다는 두모탐방로 입구

 

딸어진 노각나무꽃이 동백꽃처럼 땅위에서 또한번 꽃을 피웁니다

 

양아리 석각. 흔히 ‘서불(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의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고대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양아리 석각>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동양 최고()의 문자로서 가로 7m, 세로 4m의 평평한 바위 위에 가로 1m, 세로 50㎝ 넓이로 새겨져 있다.

서불제명각자()라고도 하는 그림문자로 상주면 양아리에서 금산() 부소암에 오르는 산중턱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조각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 시황제()의 명령으로 방사()인 서불이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려고 동남동녀()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 남해 금산을 찾아와서 한동안 수렵을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새겨 놓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시황제 때는 이미 한문자()가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의 고문자()로 추측되기도 한다.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다.

[출처]  남해 양아리 석각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까치수염도 한창

 

두모마을과 그 아래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의 저자 김만중이 유배됐던 노도

 

부소암...진시황의 장남 부소가 유배된 곳이라고는 한데....부소는 위조된 황제의 명으로 북방에 죽었다는데....영 아닌거 같고....

 

부소암앞 바위동굴...수많은 사연이 있을듯 한데...

 

장구채도 귀엽게 고개를 내밀고

 

부소암입니다 인간의 뇌모양 같기도...

4경인 부소암은 거대한 둥근 모양의 바위로 사람의 뇌를 꼭 빼닮았다. 부소암에는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서 귀양살이하고 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상사바위. 대개 상사병에 죽는다는 그런사연인데 여기는 상사병에 걸린 총각의 한(?)을 풀어줬다는...

 

산행의 또다른 꽃 중식시간

 

흔들바위 거북을 닮아 귀암이라 불렸으나 큰바위가 한사람의 힘으로 흔들린다 하여 요암이라고도 불리운다 한다

 

5년만에 다시 찾은 남해 금산

 

보리암. 638년 원효대사가 초당을 짓고 수행하다 관음보살을 친견한 후 초당의 이름을 보광사라 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보리암> 남해군 상주면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암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683년(신문왕 3)에 원효()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라 하였다.

그 뒤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금산이라 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액()하였다.

그 뒤 1901년에 낙서(西)와 신욱()이 중수하였고, 1954년에 동파()가 중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주지 양소황()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殿)을 비롯하여 간성각()·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을 거느리고 있는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씨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출처] 보리암 [菩提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리암의 트레이드마크 해수관음상

 

해골바가지 같은 쌍홍문

쌍홍문은 금산 15경으로 옛날에는 천양문(天兩門)이라 불러왔으나, 신라 중기 원효대사가 두 개의 굴이 쌍무지개 같다고 하여 쌍홍문(雙紅門)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천년을 이어왔다는 단군성전도 있음

 

줄사철나무(펌) 

 

상주 은모래비치

 

보리암이 보이는 상사바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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