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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019.7.27.(정기) / 구미 금오산 / 산타나 산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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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9차 구미 금오산

흐린 날씨속의 편안한 산행
오늘의 야생화 각시원추리 산수국

 

<금오산(金烏山)>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중국의 오악 중 중악 숭산(崇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금오산이라는 명칭은 이곳을 지나던 삼국시대의 승려 아도(阿道)가 저녁 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지은 것에 유래한다.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일컬어졌다.
인동 방면에서 금오산을 보면 능선이 흡사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워있는 부처에 빗대 금오산 와불(臥佛)이라고도 한다. 신라 말기 도선대사도 금오산의 와불을 보고서 장차 왕(王)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무학(無學)대사도 이 산을 보고 왕기가 서렸다고 하였다.
예부터 경북 8경으로도 손꼽힌 산으로 기암절벽과 울창한 산림이 조화되어 경관이 수려하다. 산세가 특이한 편인데 정상 인근에 고원 분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해발 800m 지점에 '성안마을'이라는 촌락이 형성되어 심지어 해방을 전후해서 10여 가구가 살았다 한다. 반면 분지 아래 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산세가 가파르다.
가장 높은 봉은 현월봉으로 정상에 오르면 북동쪽으로 구미시내, 낙동강이 보이며 동쪽으로 구미국가산업단지가 내려다 보인다. 정상 부근에 길이 2km의 금오산성이 있고 암벽 밑으로 벼랑 끝에 지지대를 세워 만든 약사암이라는 사찰이 있다.

 

금오산 현월봉 정상

금오산 개념도


 

범부채가 가볍게 인사를...

<범부채>

범부채는 중부 이남 섬지방과 해안을 중심으로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생육환경은 물 빠짐이 좋은 양지 혹은 반그늘의 풀숲에서 자란다. 키는 50~100㎝이고, 잎은 어긋나며 녹색 바탕에 약간 분백색이 돌며 길이가 30~50㎝, 폭이 2~4㎝로 끝이 뾰족하고 부채살 모양으로 펴진다. 꽃은 황적색 바탕에 반점이 있으며 원줄기 끝과 가지 끝이 1~2회 갈라져 한 군데에 몇 개의 꽃이 달린다. 열매는 9~10월경에 달리고 타원형이며 길이는 3㎝ 정도이고 종자는 포도송이처럼 달리고 검은색 윤기가 난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뿌리는 약용으로 쓰인다.

[출처] 범부채(야생화도감(여름), 2010. 6. 28.)

 

소나무 숲길이 인상적이다

 

금오산 산행안내도

 

초입에 조형물이 서있다

 

한여름의 계곡은 사랑스러울수 밖에...

 

금오산성 대혜문 

 

도선국사가 수련했다는 도선굴 가는길

 

도선굴

신라 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이 참선하여 득도한 곳이라 하여 도선굴이라고 하며, 암벽에 뚫려 있는 천연 동굴로 큰 구멍이라는 뜻으로 대혈(大穴)이라 하기도 한다. 최인재의 『일선지(一善誌)』에 근거하면 도선굴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또 다른 이름인 대혈이라고 불렸던 것은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굴 아래 대혈사지 터, 현재 공원 주차장이나 백운재(白雲齋) 또는 경파정(景坡亭)이 있는 곳을 대혜 또는 다혈이라 부르니 대혈이라는 명칭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일선지』에 따르면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얽어 만든 집[構屋]이 두 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인동(仁同)·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00~600명이 피난하였는데, 당시 바위틈에 쇠못을 박아 칡이나 등 넝쿨로 이동했던 상황이어서 왜군은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의 통로는 1937년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다.

[출처] 도선굴 [道詵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대혜폭포와 용담

<대혜폭포(布)>

금오산(金烏山, 977m) 대혜골의 해발고도 약 400m 지점에 있는 폭포로, 높이는 28m이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고도 불린다. 폭포 아래에 형성된 넓은 소(沼)는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는 곳이라 하여 욕담(浴潭) 또는 선녀탕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인조 때의 학자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문도들이 연중행사처럼 폭포를 찾아 목욕을 즐기고 시회(詩會)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폭포 옆 암벽에는 ‘욕담(浴潭)’이라는 예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장현광의 문도 중 한사람인 김공(金羾)이 폭포 근처 도선굴 아래에 움막을 짓고 학문을 닦다가 새긴 것이라 한다.
대혜폭포 오른쪽으로 펼쳐진 절벽의 위태로운 벼랑길을 따라 가면 신라 말의 고승 도선(道詵)이 수행했다고 알려진 천연동굴 도선굴이 있다.

[출처] 대혜폭포 [大惠瀑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드론이 표절한 산수국

 

금오산성이 보인다

 

오랜시간동안 저렇게 서있었다니

 

꿩의 다리

 

구)현월봉에서 오른쪽 30m지점에 새로운 표지석이 서있음

현월봉은 달이 걸린 봉우리란 뜻

현월봉은 주한미군 기지가 있어 60년간 통제되다가 2014년 정상개방 되었다

 

정상부 헬리포트에서 중식을

 

한 할아버지의 손주사랑이 빚은 오형돌탑
한 할아버지가 학교도 들어가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손주의 영혼을 달래기위해 10년동안 인근 돌밭에서 손수 돌을 날라 쌓은 것이라고 한다. 금오의 ‘오’와 손주 이름 형석의 ‘형’를 넣어 오형돌탑이다. 할아버지의 지극정성과 내리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약사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금오산(金烏山, 977m) 정상의 약사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으며, 1618년(광해군 10) 간행된 <일선지 一善誌>, 1799년(정조 23) 간행된 <범우고 梵宇攷>에 고찰(古刹)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 嶺南鎭誌>에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城內) 삼리(三里)에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약사암은 약사전·삼성각·일주문·종각·요사로 구성되어 있다. 1985년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건립한 약사전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약사암의 중심법당이다. 내부에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1935년 우상학이 지은 ‘약사암중수기’에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기 중 1기를 이곳 약사암으로, 나머지 2기를 수도산 수도암과 황악산 삼성암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쓰여 있다. 석조여래좌상 좌우로 일광·월광보살이 협시되어 있으며, 후불탱·신중탱·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요사채 왼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바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높이 5.5m의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이 조각되어 있다.

[출처] 약사암 [藥師庵]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약사암 종각 

 

각시원추리가 절정임

 

운해가 걷히면서 정상부 모습이 환상적

 

며느리밥풀

 

동국제일문이라...

 

바위 모서리를 깎아서 새겨 입체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금오산 마애여래입상. 1968년 보물로 지정됐다.

 

 

용트림 소나무라 명명

 

금오산 케이블카

1974년 9월 30일 운행을 시작하여 금년 2024년은 개통 50년이 된다

일찌감치 남산이나 설악산에 이어 케이블카가 가설되었다.

[출처] 문화일보 마애불 앞 1000년 촛불… 공단노동자 ‘쉼’ 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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